타인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듣거나,
뉴스를 통하거나,
삶이라는 실타래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많은 무력감을 사로잡히게 된다.
어찌할 수 없는 굵직한 돌덩어리......,
침전된 납덩어리 하나가 가라앉는다.
우리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것은 이러한 무력감의 본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맞춰 넣을 수 있는 인생이라는 운행 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스템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회전목마를 닮았다.
그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순회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를 따라잡을 수도 없고,
누구를 추월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대전쟁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자기표현이 정신의 해방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나쁘게 말하면,
미신이며 좋게 말하면 신화이다.
적어도 그림에 의한 자기표현은 어느 누구의 정신도 해방시키지 못한다.
자기표현은 정신을 세분화할 뿐,
그것은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어딘가에 도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착각이다.
화가들은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그릴 것이다.
정반대의 화가 종족들도 있을 것이다.
울며 짬뽕 먹기 식으로,
남의 것을 가져와 속 빈 깡통의 비빔밥이 볶아질 때까지 뽑는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쓸쓸한 운명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지는 시간의 운동이자 동시에 그 시간의 결에 따라 형성된 결정제이다.
회전목마 위에 정해진 속도와 시간은 허무하고 답답하지만 끊임없이 죽음과 탄생을 거듭하며,
먼지와 돌멩이와 비탄과 환희를 내뿜으며,
날마다 사이키 조명으로 돌아가고 있다.
간절한 발전의 냄새,
종북 몰이로 몰아친 끝없는 권력욕,
턱을 깎고 뼈를 깎아 분칠 해서 얻어낸 물질욕.....,
이것은 가까이 있는가,
멀리 있는가?
거리를 측량할 수 없는 태양이 내 살갗을 콕콕 찔러댄다.
멀리 있는 달빛이 숲 속의 바람을 몰아오고 나뭇잎 겨드랑이를 설레게 한다.
이것은 멀리 있는가 가까이 있는가,
아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아하고 깨끗한 식탁 후의 음식물 쓰레기가 모여 온 힘을 다해 썩어 어디로 가는가.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코스모스가 오는가?
악몽으로 오는가?
왜 십 년 전에 들었던 그 말이 오늘 갑자기 생각나는 걸까?
와이셔츠와 피부 속에 숨겨진 암세포들은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좋은 곳은 가까이 있고,
싫은 것은 멀리 있으면 좋겠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 하늘꼭대기에서 보면 천만의 콩떡일 것이다.
지난날 내가 버린 말과 언어들은 썩어 어디로 갔을까?
죽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여신과 남신들의 욕망은 먼 그리스 도시에서 부풀어 올라 천 년을 살고 오천 년을 살아 오늘도 서울 밤거리를 서성인다.
앳된 청년으로,
무난한 아줌마의 모습으로......,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걸 내 어찌 열어 보리.
그러나 노래로, 연기로, 신음으로,
내 방 창가에 어른거린다.
어쩔 때는 가까이에서,
어쩔 때는 멀리에서.
글을 쓴다는 것/염성순 화가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라나야마 호흡 법 (0) | 2023.06.19 |
---|---|
능력주의라는 허구 (2) | 2023.06.19 |
산악지방 오리싸의 고도 제이포르 (3) | 2023.06.18 |
아프리카 원주민과 흡사한 본다 족을 찾아가는 길 (0) | 2023.06.18 |
내 안의 보물을 찾아 나서는 길 (1) | 2023.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