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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다

by 매공녀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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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어느 봄날, 나는 성균관 명륜당 앞마당에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로 갔다.

명륜당은 바로 1398년부터 국가의 인재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고 선비 정신을 연마하던 된 곳이 아닌가.

그곳의 두 그루 은행나무는

 

국가 지도자로서의 드높은 기개와 학자로서의 숭고한 지조를 다지는 젊은이들에게

 

의연한 표상을 보여주려는 듯, 그 모습이 고고하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수백 년을 한결같이 그곳에서 서서 역사의 영욕을 아우르며 구름처럼 솟아나,

 

크고 작은 바람들을 기꺼이 친구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움과 여유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서 나는 무서운 침묵에 잠겼다.

'내가 루게릭병에 걸렸다니! 그래서 이제 기껏해야 삼사 년밖에 살 수 없다니!


나는 머리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었다.


이수해야 할 학점과 시험을 모두 마치고 이제 졸업논문도 거의 끝내가고 있는 중에

 

루게릭병이란 불청객이 예고도 없이 불쑥 나를 찾아온 것이다.

앞으로

 

내개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짧다는데, 


그리고 그 짧은 시간조차 온몸이 마비되는 끔찍한 시간들로 채워진다는데


그 와중에 공부를 계속한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앞으로 나는 말도 못 하게 되고

 

손에 힘이 빠져나가 스스로는 책장을 넘길 수도 없고 글씨도 쓸 수 없게 된다는데

 

공부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는 할까.

나는 심한 혼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네이버 이미지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숱한 은행나무 잎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스한 햇살 한 줄기가 봄바람을 타고 내려와 내 머리 위로 연초록 은행나무 잎 하나를 살랑살랑 보내주었다.

나는 무심코 그 은행나무 잎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작고 연약한 잎사귀에서 조금 전 느꼈던 수백 년 된 은행나무의 높고 깊은 품위와 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느니 무수한 잎사귀들은 늙은 가지에 새 가지를 뻗고 그곳에 세순이 돋아

 

바로 얼마 전 생겨난 새 생명들이다.


은행나무를 영어로는 '깅코 트리(gingko tree)' 또는 '메이든 헤어 트리(maidenhair tree)'라고 한다.

메이든 헤어트리라는 단어는

 

내게 '가르마를 곱게 탄 머리 모양을 하고 설레는 가슴으로 뜰 앞에 나선 어느 청순한 봄처녀'를 연상시켰다.

그래,

 

내가 루게리병에 걸렸다고 아직까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파릇한 잎사귀도 종말을 맞기 전에는 샛노란 은행나무 잎이 되어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가.

지레 겁먹고 암울하게 죽은만 기다릴 수는 없다.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늘 설레는 가슴을 지닌 봄처녀처럼 내 삶의 뜰을 아름답게 가꾸자.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꿈꾸고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야겠다.

 

 나는 성균관 대성전과 비천당을 지나 대학도서관으로 향했다.


열람실 책상에 펼쳐 놓은 책들과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나의 석사학위 논문 원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명륜당 앞 마 당에서 가져온 은행나무 잎 하나를 책갈피에 꽂아 두고

 

박사학위 과정 입학 원서를 사러 대학본부 건물로 향했다.





굳은 손가락으로 쓰다/이원규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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